#호프만 #이솔 #양안다 #수전 손택 CONTENTS
조해람 기자의 밑줄__ | E. T. A. 호프만 <호두까기 인형>
윤희승 인턴기자의 밑줄__ | 이솔 <이미지란 무엇인가>
문광호 기자의 밑줄__ | 양안다 <숲의 소실점을 향해>
유설희 기자의 밑줄__ | 수전 손택 <여자에 관하여>
구독자 이벤트 | '타샤 튜더' 전시회 티켓 이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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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점선면팀입니다. 오늘(26일) 레터는 한 달에 한 번 발송을 약속드린 '월간 밑줄특집'입니다. 점선면팀이 각자 감명 깊게 읽은 책에서 독자님과 함께 나누고 싶은 문장을 추렸는데요. 독자님께서 좋은 책과 함께 따뜻한 연말 보내시기를 바라며, 밑줄 특집 시작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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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계속 가엾고 못생긴 호두까기 인형 편을 들면 고통스러운 일을 더 많이 당하게 될 거야. 생쥐 왕이 여기저기서 호두까기 인형을 노리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만 내가 아니라 바로 너, 오로지 너 한 사람만이 호두까기 인형을 구해 줄 수 있단다. 그러니 지금 그 마음이 변치 않도록 마음을 굳게 먹으렴."
- E. T. A. 호프만 <호두까기 인형>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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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은 연말 하면 어떤 추억이 떠오르시나요? 제 아내는 어린 시절 어느 연말 가족과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본 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발레를 본 적 없는 저도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아름다운 음악은 곳곳에서 들어 익숙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 발레의 원작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독일 문호 E. T. A. 호프만이 쓴 원작은 발레와 내용이 조금 다르다는데요. 마침 책장 한구석에 책이 꽂혀 있길래 꺼내 읽었습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슈탈바움가(家) 아이들은 대부인 드로셀마이어로부터 장난감을 잔뜩 선물받습니다. 드로셀마이어의 선물 보따리엔 못생긴 호두까기 인형도 있었는데, 둘째 아들 프리츠가 장난을 치다가 호두까기 인형을 망가뜨립니다. 막내딸 마리는 호두까기 인형에 붕대를 감아 주고 좋은 장난감 침대에 누입니다. 그날 밤, 호두까기 인형이 깨어나 장난감들을 이끌고 생쥐 군단과 전투를 벌입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마리는 장난감들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일들을 겪게 됩니다. 부모님은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고 부정하는, 거짓말 같은 일들을요.
<호두까기 인형>은 장난기 넘치는 아이가 문지방을 폴짝폴짝 뛰어넘듯 현실과 환상을 넘나듭니다. 마리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릿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슈탈바움 가족이 등장하는 순간, 두 세계 사이엔 뚜렷한 선이 그어집니다. 사탕 도시 곁으로 레모네이드 강이 흐르는 환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마리뿐이니까요. 두 세계의 대비는 그래서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의 대비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꿈을 잃어버린 이들의 세상과, 눈을 뜨고도 꿈을 꿀 수 있는 이들의 세상은 아주 다른 풍경일 테니까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집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오직 마리만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환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걸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 환상의 세계는 다정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리츠는 전쟁놀이를 좋아하며 장난감 병정들을 자주 다그치고, 호두까기 인형도 무리하게 다루다가 망가뜨렸습니다. 발 하나를 어른들의 포악한 세계에 딛고 있는 아이라고 할까요. 반면 마리는 호두까기 인형을 다정하게 돌보고 아꼈습니다. 마리가 다른 장난감들을 대하는 장면에서도 그의 다정한 성정이 느껴집니다. 그런 마리를 환상의 세계로 이끄는 호두까기 인형도 다정한 존재이고요.
새해에는 마리처럼, 다른 존재에게 무구히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겨울은 따뜻한 온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말해주는 계절 같습니다. 독자님들도 다정한 연말 보내세요!
조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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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세계는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중략) 그럼에도 이미지에 관한 오래된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스크린 위의 이미지는 가상이며, 진정한 실재는 그 바깥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중략) 그런데 온라인 세계에 빠진 이들이 정말로 쓸모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할 뿐인 현실 부적응자일까? 이미지를 원본과 사본의 이분법에서 해방시킬 이미지에 대한 다른 생각은 없는 걸까?"
- 이솔 <이미지란 무엇인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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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이보다 스마트폰이 익숙한 Z세대입니다. 제 또래는 종이신문은커녕 온라인 기사도 잘 읽지 않는데요. 언론으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뉴콘텐츠팀 인턴기자로 근무한 지 두 달째인 제게도 더 이상 남 일이 아니게 됐습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이미지들 틈에서 텍스트로 경쟁을 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나날이 증가하는 이미지의 영향력을 외면한 채 활자를 보자고 하는 게 해법은 아닐 겁니다. 예비 언론인으로서 '이미지의 시대'라는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쩌면 위기 자체를 오진하고 있던 건 아닐까요?
<이미지란 무엇인가>는 플라톤부터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의 논의를 살펴보며 이미지에 관해 다시 사유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플라톤은 이미지를 원형인 이데아의 사본으로 취급하며, 이미지의 세계인 동굴로부터 나와 실재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속에 살지 말고 현실을 살라'는 잔소리와 비슷한 맥락이죠.
이미지를 단순한 재현으로 본 플라톤과 달리, 들뢰즈에게 이미지란 직접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동적인 존재입니다. 들뢰즈는 특히 영화를 통해, 기존의 제한된 인식에서 벗어나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이미지의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따라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들뢰즈의 말대로, 이미지의 시대가 된 오늘날 실재와 이미지를 구별하는 데 집착하는 건 효용이 없습니다. 이미 이미지는 세상과 엄청난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미지의 능동성을 무시한 채 가상에 대한 편견만으로 소셜미디어나 인공지능 생성물 등을 폄훼하는 태도는 발전적인 비판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지란 무엇인가>가 지적하는 오늘날 진짜 위기는 이미지의 범람이 아니라 콘텐츠의 범람입니다. 같은 장면을 마구 찍어나르는 숏폼들은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하며, 3분 요약 리뷰 콘텐츠와 리액션 콘텐츠 등을 통해 사유와 경험을 외주화하는 태도는 획일적인 주장만을 답습하게 합니다. 게다가 자본주의 논리 위에서만 활발하게 생성되는 콘텐츠는 비즈니스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더 많이, 빠르게 팔리기 위해 생산된 콘텐츠들은 보는 이에게 의미를 곱씹을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이미지의 시대, 정확히는 콘텐츠 시대가 어떻게 흘러갈지 정확히 알긴 어렵습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막연한 결말을 걱정만 하기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제대로 묻는 일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곳은 바로 이 새로운 매체적 현실에서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이 지긋지긋함, 어떤 염증으로부터이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그 실마리를 전합니다. 뉴콘텐츠팀 인턴기자로서 저 역시 고민하며 질문을 던져봅니다. '콘텐츠란 무엇인가?' 하고요.
윤희승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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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 두 눈을 가린 채 생활하다 끝내 안대를 벗은 사람이 있을까 빛을 처음 목격한 듯이 나는 카메라를 쥐고 세상을 담으려 애썼다
(중략)
윤은 몬데와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간혹 몬데는 방금 죽은 사람인 것처럼 말이 없어질 때가 있었는데 윤은 그 침묵을 사랑했던 것 같다 폭우 속을 함께 걷기 위해서 하나의 우산만 챙기는 거라고, 쏟아지는 비에 어깨를 적시며 윤은 말했다 귀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흔들거렸고
때때로 원은 내게 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가끔은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바람이 불지 않는 지점에서 꽃잎을 떨어뜨리는 힘은 무엇일까'라거나 '가만히 있는 것이 식물의 자세라면 식물이 되어도 좋았을 텐데'와 같은 (중략) 나는 죽은 친구의 마지막 편지를 꺼내 읽는다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너에게 이런 편지를 적는 일도, 우리가 나눈 수많은 대화나 위로가 전부 쓸모없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너는 한 번도 우리들을 앵글에 담으려 하지 않았지. 널 미워하지 않았어. 그러나 아무도 날 붙잡지 않았어.' (중략) 우리가 일찍부터 침묵을 사랑했다면 어땠을까"
- 양안다 <숲의 소실점을 향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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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신 적, 있으신가요? 생각에 잠겨 있노라면 온갖 소음들이 선명해집니다. "빨래 마르는 소리"까지도요. 그럴수록 몸은 눅눅해져 자꾸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우울은 그런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공론장에만 서면 우울은, 구체적인 양상이 사라지고 건조하고 사무적인 진단으로 남습니다. 이는 청년 자살률이 13년 만에 가장 높았던 충격적인 현실조차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넘기게 만듭니다. '불안과 우울 때문이야'라는 답이 정해져 있거든요.
우울과 불안의 얼굴이 수천수백가지면 어떡해야 할까요? 그때도 답은 쉬울까요? 한가지 분명한 건 지금 우리에겐 보다 정교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청년들이 왜 우울하고, 어떻게 불안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헤매고 있을 사람들 위해 양안다 작가의 시집 <숲의 소실점을 향해>는 우울과 불안의 40가지 모습을 그립니다.
"불안이란 건 내릴 수 없는 그네를 타는 거라고, 천장과 바닥 사이를 요동치는 거라고, 그렇게 이해했어." '우울 삽화'에서 이같이 묘사한 생각의 진자운동은, '조각 꿈'에서는 표현의 한계("슬프다고 말했다/의미가 퇴색될 때까지")까지 나아갑니다.
'정상'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는 우울을 세상 밖으로 꺼내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손에 쥔 것이 비명이라면'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나만 이런 거 같지/다들 어떻게 잘 숨기며 사는 거지/과거의 기억으로 나를 괴롭힐 것, 재앙과 마주할 때에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여길 것,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는 빠른 템포의 음악을 들을 것, 사람들 앞에서 웃을 것, 나를 단정하게 하는 물품은 왼쪽 주머니에, 나를 망치는 물품은 오른쪽, 분노를 삼킬 것, 집으로 돌아와 미치지 않을 것, 미치지 않을 것, 미치지 않을 것/이 모든 걸 잘 지키며 살아갈 것"
최근 경향신문은 우울증을 겪어온 10~30대 여성 28명의 삶을 들여다봤는데요. 이들은 우울을 개인의 잘못으로 탓할 게 아니라 구조적 고통으로 정의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건 분노의 대상을 개인에서 구조로 되돌리는 시발점이기도 할 겁니다. 여성 우울증을 다룬 책을 쓴 하미나 작가는 칼럼에서 "세상에는 아무리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이뤄질 수 없는 꿈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뒤 달라진 점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일찍부터 침묵을 사랑했다면 어땠을까."('나의 아름답고 믿을 수 없는 우연' 중에서) 양안다 작가는 카메라로 친구의 슬픔을 담지 못했던 것을, 침묵까지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그리고 끝내 낙하산이 돼주지 못했던 것을 가슴 아파했습니다. 슬픔을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낙하산이 돼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혹시 우울을 겪고 있을 독자님께, 기사 속 우울을 겪는 사람들의 말 가운데 하나를 전합니다.
"죽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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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팔과 다리를 움직여 춤이라는 걸 출 때마다 나는 아몬드나무를 여럿 그렸다는 어느 화가가 떠올랐다 화가는 어느 마을에서나 미움받으며 방랑했기 때문에 나는 정처 없이 길을 헤맬 때마다/바람결에 후두둑 아몬드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중략) 겨울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아몬드나무 가이드' 중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에 있는 '꽃피는 아몬드나무'라는 작품입니다. 나무 아래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그려진 그림인데요. 소실점을 염두에 두고 보다보면 처음엔 미처 몰랐던 입체감이 느껴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죽기 전 마지막 봄, 막 태어난 조카를 위해 이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아몬드나무는 겨울의 끝자락에 꽃을 피웁니다.
문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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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에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도덕적 타락이 바로 자기 나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여성은 자신에게 감옥 속의 안전과 특권을 제공하는 대신 자신을 탄압하고 실질적 불만족을 일으키는 그 모든 그릇된 통념에 상징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같다. 여성은 나이를 속일 때마다 자기 자신을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공범이 된다.
여성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 여성은 그저 친절한 것이 아니라 현명해지기를 염원할 수 있다. 그저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 유능해지기를, 그저 우아한 것이 아니라 강해지기를 원할 수 있다. 그저 남자와 자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야심을 품을 수 있다. 여성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들며 이 사회의 나이 듦의 이중 잣대에서 비롯된 통념에 적극적으로 불복하고 저항할 수 있다."
- 수전 손택 <여자에 관하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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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상 <나이 든 창부(The Old Courtesan)>. 수전 손택은 <여자에 관하여>에서 '노년(Old age)'이라고도 불리는 이 조각상에 '여성의 삶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잘 묘사되어 있다고 말한다.
닷새만 지나면 한 살을 더 먹게 됩니다. 나이 앞자리가 바뀌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돌이켜보면, 여성인 저는 20대 후반 이후부턴 나이 듦을 의식하게 되면서 연말이 마냥 행복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불편함이 가장 절정에 달했던 때는 스물아홉살이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앞자리가 '3'으로 바뀌는 것을 '인생이 끝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귀엽고 우습지만요, 몇년 뒤 앞자리가 '4'로 바뀌는 걸 과연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문해보면 자신이 없습니다. 여전히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자리하고 있는 건데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불리던 작가 수전 손택의 <여자에 관하여>는 그가 여성에 관해 쓴 여러 에세이를 묶은 책입니다. 첫번째 챕터 '나이 듦에 관한 이중잣대'는 여성의 나이 듦에 관한 현실을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손택은 "나이 드는 일은 모든 여성의 삶에서 가장 큰 비극이며, 틀림없이 가장 오래가는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손택은 1972년 40대를 목전에 둔 39세에 이 글을 썼는데요. 그 역시 앞자리가 바뀌는 해가 두려웠다고 털어놓습니다. 그는 "매년 생일, 그중에서도 특히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해의 생일은 새로운 패배로 느껴진다"며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여성은 사실 서른아홉일 때와 거의 다르지 않은데도 이날을 하나의 전환점처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왜 나이 듦은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만 비극일까요? 손택은 말합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에는 오직 소녀의 아름다움이라는 한 가지 기준만 허용된다. 남성이 누리는 크나큰 이점은 우리 문화가 소년의 아름다움과 남성의 아름다움이라는 두 가지 기준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소녀와 소년의 아름다움은 모두 생애 주기 초반에만 피어나는 연약한 아름다움입니다. 남성의 아름다움은 성취를 뜻합니다. 스포츠로 단련된 강인한 몸, 유능함과 경쟁심으로 얻어낸 돈과 명성은 '남성성'을 상징하죠.
반면 '여성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시기는 아주 짧습니다. 유능함, 강인함, 정신력 등의 '남성성'은 젊음이 사라져도 위협받지 않고 강해지지만 아름다움은 노화를 잘 견디지 못합니다. 여성은 삶의 후반기인 3분의 2에 해당하는 시기를 "나이의 침략에 맞서 자신을 창조(그리고 유지)해야"만 합니다.
특히 여성이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단지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손택은 강조합니다. "심각한 형태의 반감, 혐오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반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노화로부터 맞서지 않는 여성은 마녀로 취급당하기 때문이죠. 그는 "여성에게 가장 가혹한 태도 중 하나는 나이 드는 여성의 육체에 본능적 공포를 느끼는 것"이라며 "마녀 공포증은 이러한 공포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말합니다.
여성들이 나이 듦의 이중잣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요. 손택은 "여성은 얼굴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기. 쉬워 보이지만 전혀 쉽지 않은 이것이 나이 듦의 이중잣대에 불복하고 저항하는 방법 아닐까요?
유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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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타샤 튜더' 전시회에 독자님을 초대합니다
안녕하세요. 점선면입니다. 연말을 맞아 경향신문이 미디어 후원하는 타샤 튜더 기획전 《Still, Tasha Tudor》 티켓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점선면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인증해주신 독자님들 중 50명을 추첨해 티켓 2장씩을 선물드릴 예정입니다. 관심 있는 독자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참여 안내 1) 아래 구글폼 링크를 통해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점선면 인스타그램(@newsletter._o)을 팔로우하신 후 인스타그램 아이디와 주소(인증 및 선물 발송용)를 남겨주세요. 2) 이벤트는 오는 12월31일까지 진행됩니다. 참여해주신 독자님 중 50분을 추첨해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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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4일) 레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허위·조작정보 근절법'과 관련된 언론계·시민사회의 우려를 짚어봤습니다. 많은 독자님이 보내주신 찬반 의견을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오늘 레터는 점선면팀이 인상 깊게 읽은 책 구절을 소개하는 '밑줄 특집'을 전해드렸습니다. 독자님의 '한 줄'은 무엇인가요?
📌손쉽게 카카오톡으로 뉴스레터 점선면 받는 법? 안내페이지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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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사를 읽고 지난번 '점선면은 중립적일까?' 기사글이 생각났어요. 지향을 숨기지 않되 그곳으로 향하는 수단은 공정하고 객관적일 것. 이런 가치관을 가진 언론은 우리 사회가 꼭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요. 불편할수록 더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편한 곳에 정의가 있을까요. (마리이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의 목적은 적극 공감하지만, 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권력에 대한 정당한 비판까지 억압할 수 있는 요소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요새 가짜뉴스를 너무 많이 퍼뜨리는 유튜버에 대한 제재는 제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언론사가 잘못 보도한 경우보다 유튜버가 가짜뉴스를 고의로 확산시키는 경우가 요새는 더 많아 보이거든요. (익명의 독자님)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인정하기로 했다던데.... 이래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결국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본다. 뇌물을 받아 먹어도 그 사실을 폭로하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니까 이제 더욱 맘놓고 선물이고 뇌물이고 마구 받으시라! (일송님)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라"라고 말씀하시다니 말씀이 지나치게 느껴집니다.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 모두 다 공감합니다. 동시에 허위정보는 빈대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세뇌하는 정도로 느껴집니다. 중학생들 멘토링하는데 애들이 유튜브, 인스타 릴스 등에서 극우 기독교애들이 만든 듯한 허위정보, 혐오 콘텐츠들 무분별하게 무비판적으로 학습하고 내면화해서 미래세대가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어가는지는 알고 말하시는 거세요? 경향신문 기자님들, 비판은 말이야 쉽지 대안을 내놓으세요. 어쩌라고요, 어떡하라고요? (씨드님)
💬이번 레터에서는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대해 윤석열 정권의 언론탄압과 비교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부과하는 과징금은 일단 과징금을 납부한 후에 이를 다투는 소송을 제기해서 과징금을 면하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은 손해를 주장하는 자가 언론 유튜버 등에게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한 경우에만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면에서 상당히 다른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해 불편한 비판을 위축시킨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불편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불편한 비판을 하고자 한다면 사실에 기반해서 정확한 방법으로 잘못된 곳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꼬집어야 합니다. 언론은 자신의 비판이 타당한지에 대해 여러 번 자문해야 하고요. 이런 측면에서 점선면의 레터는 불편한 비판을 편리하게 하고 싶은 언론사의 안이한 마음을 드러낸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징벌적 손해배상의 기준으로 손해만 포함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얻은 이익까지도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더 강력하게 입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유튜버들의 거짓정보가 범람하는데, 이들은 피해자의 손해보다 월등히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plempty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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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면팀은 늘 독자님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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