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숙 #오가와 사야카 #장강명 CONTENTS
문광호 기자의 밑줄__ | 한말숙 <아름다운 영가>
조해람 기자의 밑줄__ | 오가와 사야카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유설희 기자의 밑줄__ | 장강명 <먼저 온 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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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김없이 '월간 밑줄'의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독자님께 좋은 책과 글귀를 소개드리자는 생각으로 시작해본 특집인데요. 어떤 마음으로 읽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언젠가 보내주실 답장을 기다리며 3월의 월간 밑줄 시작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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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데이트 때입니다. 그녀는 냇가에서 성냥을 켜서는 한창 피어 잇는 코스모스 꽃잎에 불을 붙여 태우려고 했어요. 제가 꽃잎에 수분이 있어서 타지 않는다고 하니까 이과 공부한 사람은 그래서 탈이라고 하며 깔깔 웃으면서 갑자기 제 가슴에 얼굴을 푹 묻으며 몸부림을 쳤어요. 내 눈에 자기 외의 어떤 것도 예쁘게 보이면 참을 수 없다는 거예요."
- 한말숙 <아름다운 영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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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다. 덕만을 사랑하면 그리해야 한다. 연모, 대의, 신라. 어느 것 하나 나눌 수가 없는 것들이다."
2009년 방영한 드라마 <선덕여왕> 속 매력적인 악역 '미실'(고현정 분)이 아들인 비담(김남길 분)에게 하는 명대사입니다. 이는 '미실이 누구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사인데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그럼에도 밉지가 않은 이유일 겁니다.
그런데 17년 전 저는 이 대사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빼앗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빼앗긴 사람은 상처를 받을 테고, 빼앗는 사람도 두렵고 무서울 텐데' 하고요. 고백하자면 저는 이해를 포기한 채 10여년을 살았습니다. 한말숙 작가의 소설 <아름다운 영가>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죠.
정확히는 소설 속 등장인물(주인공은 아닙니다)인 영숙에게서, 저는 빼앗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 될 수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영숙은 남편인 장 박사를 지독히도 사랑했는데요. 장 박사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는 모든 것을 빼앗을 정도였습니다. 조그만 꽃까지도요.
영숙은 아파했고, 장 박사는 지쳤습니다. 그러던 중 장 박사의 외도가 시작됐습니다. 상처를 더치는 장 박사의 일탈에 영숙의 대응은 기괴했는데요. 영혼을 치유해야 한다며 심령술에 의존한 것은 자기방어기제로 볼 수 있지만 장 박사의 시답잖은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는 건 어떻게 봐도 이상했습니다.
작가는 소설 속에 웃음의 의미에 대한 단서를 남겼습니다. "통쾌, 야유, 조소, 아첨…… 그 어느 의미건 간에 웃음은 울음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이다." 장 박사의 바람에 그저 울기만 했다면 영숙의 캐릭터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영숙은 그를 철저히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건 처절한 의지의 표현이자, 장 박사가 삶을 견디게 한 도덕성마저 앗는 비수였습니다.
이후 소설은 영숙의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흘러갑니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영숙이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걸 빼앗더라도 얻고 싶은 그 마음이 너무 찬란하다가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졌거든요. 신분과 차별을 자기 식대로 극복하려 했던 미실처럼요.
그에 비하면 제 삶은 빼앗으려는 쪽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빼앗아본 적도 없는 것 같고요. 그러다 문득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님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읽혔다면 말이죠. 하하.
기왕 빼앗는다면 대신 좋은 기억을 남겨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만 있다면 저는 앞으로도, 아낌없이 빼앗겠습니다.
문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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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카라마가 내게 물었다. "사야카, 사기를 당했을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정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내가 "음… 경찰이나 변호사?" 하고 대답하자 "아니지. 그야 사기꾼의 친구인 게 당연하잖아. 누가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모르는 거야. 왜냐하면 미래는 아무도 모르거든. 성공한다면 대기업 경영자인 동료가 중요해질 수 있어. 하지만 체포당하면 수감자인 동료가 중요해지는 법이야. (중략) 중요한 것은 동료의 숫자가 아냐. [유형이 다른] 이런저런 동료가 있는지야"라고 말한다.
- 오가와 사야카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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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마굴, 비공식 지하경제의 성지, '구룡성채'의 뒤를 잇는 슬럼…. 온갖 위험한 수식어가 붙는 이 건물의 이름은 홍콩의 유명 주상복합 빌딩 '청킹맨션'입니다. 영화 <중경삼림>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보면 낡은 외관과 미로처럼 얽힌 어두운 복도가 여행객들의 경계심을 부르죠. 이 뒷세계를 주름잡는 남자, 탄자니아인 커뮤니티의 '보스' 카라마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일까요?
조금도 무섭지 않습니다. 아이처럼 철없고 허술합니다. 중고차·전자제품 브로커인 카라마는 장사가 잘될 때는 큰돈을 벌지만, 돈을 못 버는 날은 지인을 찾아가 넉살 좋게 밥을 얻어먹습니다. 늦잠을 자느라 약속시간을 지키는 법이 없고, 허구한 날 웃긴 동영상을 보며 낄낄댑니다. 탄자니아인들은 그런 카라마를 불편해하기는커녕 "참, 못 말린다니까"라며 마주 웃어줍니다.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범한 장사꾼이다가도, 인스타그램에서 관심을 못 끌면 입이 비쭉 나와 침울해지는 카라마는 틀림없이 매력덩어리입니다.
문화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의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는 "덜 된 인간" 카라마를 중심으로,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 커뮤니티가 어떻게 자신들만의 질서를 구축해 살아가는지를 관찰한 논픽션입니다. 청킹맨션에 장기 체류하며 탄자니아인들과 부대낀 작가는 그들의 상호작용에서 독특한 점을 발견합니다. 배신과 불법이 일상인 뒷세계에서 그들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생판 모르는 남의 곤경에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사업을 연결해주고, 질병 등으로 사망하면 돈을 모아 고국으로 시신을 운구해주기까지 합니다. 이런 도움은 '겸사겸사' 능력 되는 대로 이뤄집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는' 관계, 보답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믿음 없이 베푸는 친절…. 낯설지만, 사야카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처지에서는 이런 관계가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홍콩의 탄자니아인들은 '인간은 처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믿음은 '사람은 선한 존재이니 좋아질 수 있다'는 쪽보다는, 사람과 삶의 불확실성을 오롯이 수용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청킹맨션의 이민자 대부분은 체류 신분이 불안한 처지입니다.
겸사겸사 베푸는 호의는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고, 증여 관계에서 '위계'가 발생하는 것도 막습니다. 엄밀한 계약보다는 어딘가 허술하고 인간적인 모습들로 맺어진 신뢰관계 위에서 이들은 돈벌이를 합니다. 카라마의 철없는 모습도 이런 관계 속에서 터득한 비즈니스 방식 중 하나죠.
사회보장제도를 향한 불신이 늘고 내일의 삶은 점점 불확실해지는 요즘입니다. 사야카는 홍콩의 탄자니아인들에게서 새로운 대안을 발견합니다. "매 순간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셈해서 딱 맞아 떨어지는지 신경 쓰"는 각박한 현대 사회를 넘어, "딱히 뛰어나지 않고 때로는 불성실하다 해도 누군가의 변덕 덕에 반드시 살아갈 수 있는 분배경제의 유토피아"를요. 카라마와 탄자니아인들이 각자도생의 세계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조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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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문 바둑전문기자는 알파고의 등장 이전을 기원전에, 알파고 이후를 기원후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KB바둑리그 전문기자, 바둑TV 편성제작국장, 넷바둑 대표, 대한바둑협회 전무 등을 지내며 30년 이상 바둑 관전기와 바둑평론을 썼다. 나를 만난 자리에서 안 기자는 "이제 중세가 끝났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바둑 역사를 길게는 5000년으로 보거든요. 그 5000년 동안 바둑의 패러다임은 인간 중심이었는데, 그게 끝난 거죠. 단순히 포석이 변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바둑을 대하는 방식, 바둑의 토양이나 문화 같은 게 송두리째 다 바뀌어 버렸어요. 알파고 이전까지 바둑을 도(道)로 봤던 관점이라든가, 입단 제도라든가, 관전 문화, 프로기사들의 삶, 아마추어 기사들의 삶 등등 바둑의 전 영역에 걸쳐서 패러다임이 바뀐 거예요."
- 장강명 <먼저 온 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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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구글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에서 AI가 승리했을 때 세상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특히 한국 바둑계는 공황에 가까운 분위기였죠. 작가 장강명은 프로 바둑 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7명을 인터뷰해, 남들보다 몇 년 앞서 AI의 역습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바둑계의 현실을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에는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헌신해 온 일을 인간보다 더 잘해내는 AI가 등장했을 때, 우리가 믿어온 '인간적 가치'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창의성'입니다. 그동안 프로 기사들은 '기계는 배운 대로만 둔다, 창의성이 없다'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알파고는 매우 창의적인 수로 이세돌 9단을 꺾었습니다. 첫 번째 대국 초반, 알파고가 둔 수를 보고 해설자들은 "인간 바둑에서는 볼 수 없는 수"라며 악수라고 평가했지만, 대국 종반에 이르자 그것이 승착이었음이 명확해졌죠.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수를 낸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곤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창의성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나? 기계도 창의적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창의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알파고 대국을 지켜본 바둑 기사들은 직업적 긍지마저 잃었습니다. 인간이 두는 수가 AI에 비해 얼마나 불완전한지가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과거 전설적인 대국의 '신수'를 AI에 입력해 보니 승률이 뚝 떨어지는 '악수'로 판명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조혜연 9단이 "알파고 이전의 책들은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이제 사람들은 AI에게 바둑을 배우고, AI와 얼마나 비슷하게 두는지를 나타내는 '일치율'로 기사의 실력을 평가합니다. 자연스레 프로 기사들은 과거의 권위와 일자리를 잃어가는 처지가 됐습니다.
바둑계가 겪은 진통은 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일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언론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AI보다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까', 'AI가 더 탁월한 기사를 써준다면 기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같은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AI 시대에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강명은 '탁월함'이 아니라 '스토리'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2007년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출연한 휴대전화 외판원 폴 포츠. 그가 맑은 음색으로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첫 소절을 불렀을 때, 객석은 환호와 기립박수로 가득 찼습니다.
장강명은 "포츠를 스타로 만든 건 노래 실력만이 아니라 그의 스토리"라고 강조합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학창 시절 괴롭힘과 병마를 이겨내고, 변변찮은 일자리를 전전하면서도 성악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서사가 없었다면 그가 그토록 큰 주목을 받았겠느냐는 것이죠. 결국 사람들이 인간의 콘텐츠에 기대하는 건 '완벽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서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AI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같은 본질적인 질문과 치열하게 마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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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6일) 레터에서는 1년 전 영남 산불이 할퀸 숲의 상처를 극복하는 경북 의성군 고운사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산림 복원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자연의 회복력에 맡기는 '자연복원'이 큰 효과를 보고 있다는 소식이었죠. 오늘은 매달 좋은 문장과 함께 돌아오는 '월간 밑줄'을 보내드렸습니다. 독자님이 그은 밑줄도 궁금합니다!
한 독자님께서 '구독하기를 눌렀는데 왜 계속 구독하기가 뜨나요'라고 질문 주셨는데요. 점선면팀이 뉴스레터를 보내드리는 '스티비' 플랫폼 특성상, 레터를 구독하고 메일로 받아보셔도 레터에 있는 '구독하기' 링크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구독에 감사드리며 매일 충실한 레터로 보답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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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산불이 크게 일어난 후에 다른 매체에서 산불 복구와 관련해 산림청의 복구 방안(침엽수 위주의 숲 조성)을 비판하고, 다양한 수종을 심는 것이 산불 예방과 자연 회복에 더 효과적이라고 한 특집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자연 복원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겠지만, 인간이 무리하게 자연에 개입하는 것을 점차 최소화하는 방향이 더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타로님)
💬다 타버린 숲에서도 다시 생명이 스스로 자라난다는 것이 정말 신비롭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든 자연은 자연대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며 만족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자연복원에 찬성하는 쪽입니다. 인공조림을 한다고 산사태나 다른 자연재해의 가능성이 특별히 낮아지는 것 같지도 않고요. 복원은 자연에 맡기고 인간은 산불 예방에 더 힘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익명의 독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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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면팀은 늘 독자님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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