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이 지났지만 유가족의 시계는 그날 그 시간에 멎어 있습니다. 계절이 흐르고 10월은 착실하게도 돌아오는데, 아픔은 세월을 따라 흘러가지 않고 고일 뿐입니다. 김진성씨(50)는 숨진 조카가 선물한 커피 기프티콘 유효기간을 계속 연장합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가 아물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며 "매년 기일이 다가오면 아픔이 그만큼 누적된다"고 했습니다.
딸에게 '서울에서 놀고 돌아오면 꽃게탕을 끓여주겠다'고 약속한 이숙자씨(54)의 냉장고 냉동실에는 꽃게 2마리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10월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면마비가 찾아오고 "온몸이 칼로 저미듯" 아픕니다. 그는 "10월이면 사람들이 단풍도 피고 여행도 가지만 우린 그럴 수 없다"며 "우린 항상 그날에 있다"고 했습니다.
일부 정치인과 언론의 '2차 가해'는 유가족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포털 사이트 뉴스 댓글창에도 피해자들을 탓하는 말이 쏟아졌습니다. 사고 이후 정부의 대응이 혼선을 빚으면서 피해자들이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광주에 사는 김영백씨(64)는 직접 구급차를 불러 숨진 아들 재강씨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김씨는 아들의 49재 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강아, 무능하고 무책임한 세상에서 그동안 살아오느라 고생 많았다. 불안전한 이 세상 미련 두지 말고 안전한 곳에 가서 못다 한 꿈 마음껏 펼치거라."
국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유가족은 직접 싸우기로 했습니다. 삼보일배하고, 머리를 밀고, 더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온갖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이들을 가로막았습니다. 윤 전 대통령은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이태원 특별법'에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죠. 당시 경찰·소방 총책임자인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의 어깨를 언론 카메라 앞에서 보란 듯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국가가 외면한 자리를 채운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위로였습니다. 밤낮으로 분향소를 지키며 손을 잡아 준 시민들, 행인들의 가방에 걸린 보라색 리본들이 유가족들의 버팀목이었습니다. 딸을 떠나보낸 박지연씨(53)는 "시민분들이 기억해주신다는 건 내 안에 우리 아이가 살아있다고 얘기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사로 목숨을 잃은 외국인 희생자들의 유가족도 한국을 찾아 한국 유가족과 슬픔을 나누고, 그간의 싸움에 대한 감사를 표했습니다.
유가족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 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지만, 다른 이가 억울하게 떠나는 일만큼은 막아보자는 다짐입니다. 유가족은 '기억의 힘'을 믿습니다. 참사를 잊어버린다면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지만,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생명을 함부로 잃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유가족은 오늘도 온몸으로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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